[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짧은 여행의 기록》,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절망에서 절망으로 이어지며, 그래서 더 반짝거리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1988.11
기형도-
쓸쓸한 눈발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을 믿으며, 지금의 고난과 무력감이 지나가고 나면 결국에는 새로운 창작의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의지가 있다는 것을 담아낸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 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미빛 인생」
이 시는 사내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그가 삶에서 느끼는 깊은 회의감과 증오를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이 시는 인생의 후회와 성찰을 담아내 줍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겪어온 시간들을 회고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을 표현해 주는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이 시는 유년 시절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시입니다. 성인이 돼서 다시 들여다보니 느낌이 색달랐습니다. 이 시에서는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표현해 줍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셔서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의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담아낸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라는 시집은 기형도 시인의 시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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