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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라는 시집입니다.
이제니 시인은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마도 아프리카》,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우리는 우리를 몰라서, 그 균열 속에서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담아낸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나무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다
구름은 어제보다 조금 더 죽는다
손가락과 심장으로
순간 속에서 순간 속으로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간다
-2014년 11월
이제니-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한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언덕 위에서 소리 없는 구슬을 던지고 있었다. 구슬은 낙하한다. 구슬은 추락을 용인한다. 구슬은 울지 않는 날들 속에서 태어난다. 울음의 입을 막고 있는 둥글고 불투명한. 그는 끊임없이 말한다. 그는 끊임없이 입을 다문다. 하나의 죽음을 갖기 위해 사십 년의 생이 필요했다. 이 생을 좀더 정성껏 망치기 위해 나는 몇 마리의 개를 기르고 몇 개의 무덤을 간직하였으며 몇 개의 털뭉치를 버렸다.
서서히 눈멀어가는 개의 고독
두려움이 모종의 소리로 흩어질 때
그는 어둠을 본다. 어떤 어둠. 소리 없는 구슬 속에 도사린 어둠. 구슬은 수천수만으로 분열되어 빛의 분수처럼 터져나가며 다시 최초의 어둠으로 태어난다. 그는 잿빛, 잿빛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는 죽기 직전의 감정으로 잿빛이라는 말을 고안해낸다.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희망의 여지 없음을 생의 헌사로 받아들이기로 한 불구자의 내면을 생각하는 밤. 되찾을 수 없는 것을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희망. 그는 견딘다. 그는 기쁘게 견딘다. 습도가 낮은 방. 모든 물체는 정전기를 일으킬 수 있다. 잃어버린 신체의 일부라 할지라도. 이 빈혈성의 불꽃은 더없이 희미하다. 더없이 희미한 채로 온전히 환하다.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구슬은 흐른다. 어김없이. 어쩌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마치 쏟아지듯이. 누군가의 비밀스런 적의처럼.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처럼. 구슬은 흐른다. 그는 몇 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것이 그 자신의 죽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미 죽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그는 지난 사십 년간 애완해왔던 것들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다. 그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속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그것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는 기록에 골몰한다. 그가 낭비했던 무수한 종이들. 종이 위의 흉터를. 기억의 흉터를 지워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는 또다시 종이를 낭비한다. 구슬은 흐른다. 소리 없는 소리 속에서 태어나는. 둥글고 불투명한.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개의 동공은 점점 굳어간다
식어가는 빛. 하얗고 불투명한
안개와 안개 사이. 불빛과 불빛 사이
두 개의 동공은 서서히 멀어져간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간신히 의지한 채로. 가장 가까운 동시에 가장 멀리 있는 두 개의 구멍.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어둠의 밀도가 깊어진다. 그는 드디어 두려움을 보기 시작한다. 최초의 장면처럼 어둠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 자신의 유령을 바라본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도려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맹렬하게 짖어댄다.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짖어댄다. 어둠이. 더 깊은 어둠이. 잿빛이. 더 깊은 잿빛이.
불투명하고 둥근 빛 속에 간신히 은거하는 몸. 그는 그저 겨우 몇 개의 구슬을 반복적으로 던질 수 있을 뿐인데. 그것들은 폭죽처럼 터지며 빛의 속도로 어둠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인데.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무언가 전도되고 있는. 슬픈 동시에 아름다운. 손쓸 도리 없는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무언가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다는 자각의 순간에. 그는 그저 몇 개의 단어를 반복적으로 내뱉으며. 누군가에게 위안의 말을 던지는 것으로 자신을 위안한다. 그 순간. 아름답고도 막막한 거리가 생겨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찰나 속에서. 아롱진 새 떼와 마지막 나무 사이에서. 눈부신 잿빛 속에 놓여 있는 오래된 개의 고독을. 그 불투명하고 둥근 구슬을 바라보는 것인데.
잿빛에서 잿빛까지
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으로
누군가 언덕 위에 서서 소리 없는 구슬을 던지고 있었다. 구슬은 불투명한 소리를 내며 구르는 동시에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무덤 곁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두려움 없는 매복의 자세로. 소용돌이치며 둥글게 흔들리는 동공 속으로. 잿빛 속으로. 잿빛을 향해. 울면서. 속으로 울면서. 뛰어들고 있었다.
「나선의 감각-잿빛에서 잿빛까지」
이 시 속 어둠은 시 전반에 걸쳐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며 인간 내면의 두려움, 불안, 그리고 존재의 불확실성을 나타내 줍니다. 또한, 상징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 거리에서 너는 희미하게 서 있었다. 감정이 있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굳건함이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오래 믿는다는 뜻인가.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녹색의 빈 가지가. 잊는다는 것은 잃는다는 것인가. 잃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려준다는 것인가. 흙으로 돌아가듯 잿빛에 기대어 섰을 때 사물은 제 목소리를 내듯 흑백을 뒤집어썼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영영 아프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영영 슬프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이 시는 삶의 덧없음과 고독, 그리고 존재의 불확실성을 다뤄내 줍니다. 그리고 매일 슬픔을 마주하며 꽃의 일시적인 아름다움과 사라짐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해 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 밀려날 때 저 밑바닥으로부터 번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어둠으로 몰려갈 때 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말한다. 뒷모습은 뒷모습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으로 살아남아 오래 전 그 해변을 걷고 있다. 그 옛날의 우리로서 오늘의 이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의 손이 누군가의 손을 잡았을 테고. 누군가의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을 테고. 누군가의 눈이 누군가의 눈을 지웠을 테고. 누군가의 말이 누군가의 말을 뒤덮을 테고. 노을은 우리의 뒤쪽에서부터 서서히 몰려왔고. 서서히 물들였고. 서서히 물러났고.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보려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언덕. 둔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빠지는 기분으로.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울음. 물음.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점점 더 물러나는 기분으로. 그때에도. 이미. 벌써. 여전히. 아직도. 이것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고 믿는 마음이 있었을 테고. 순도 높은 목소리 사이사이로 몇 줄의 음이 차례차례 울렸을 테고. 뒤가 없는 듯한. 이미 뒤가 되어버린 듯한.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 사이사이로. 어떤 풍경이. 어떤 얼굴이. 어떤 기억이. 어떤 울음이. 점점이 들렸을 테고. 귀신에 들리듯. 바람에 날리듯.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너는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지금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고.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 그 사이와 사이. 다시 그 사이와 사이사이의 사이. 사라지는 이 순간만이 오직 아름답다고.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로 사라질 때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인가. 밤은 밤으로. 다시 건너가고 있는데. 하루는 하루로 다시 기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이 시는 사라져 가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강조하며, 존재의 의미를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라는 시집은 삶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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