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시집입니다.
이원하 시인은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영롱보다 몽롱》,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등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섬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삶의 흔적을 담아, 날아온 '편지' 같은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편지 아닌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해요.
저 아직도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2020년 4월
이원하-
솔직함, 그리고 일상의 일부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 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 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 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이 시는 자신의 감정을 자연과 교감하면서 풀어내는 과정을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고독과 슬픔, 감정의 해방,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표현한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하늘에 다녀왔는데
하늘은 하늘에서도 하늘이었어요
마음속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 말도 잡히지 않았어요
먼지도 없었어요
마음이 두 개이고
그것이 짝짝이라면 좋겠어요
그중 덜 상한 마음을 고르게요
덜 상한 걸 고르면
덜 속상할 테니깐요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가로등 불빛 좀 밟다가 왔어요
불빛 아래서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뒤졌는데
단어는 없고 문장은 없고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삶만 있었어요
한 삼 개월
실눈만 뜨고 살 테니
보여주지 못하는
이것
그가 채갔으면 좋겠어요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이 시는 내면의 공허함과 고독, 속상함을 표현하며 감정의 회복과 위로를 갈망하고, 시인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 돋보이는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추억하는 일은 지쳐요
미련은 오늘도 내 곁에 있어요
내가 표정을 괜찮게 지으면
남에게만 좋은 일이 생겨요
복잡한 감정을 닦아내기엔
내 손짓이 부족해요
용서는 혼자서 할 수 없죠
하는 수 없이
새벽 늦게 잠이 들죠
이번 문제 때문에
단 몇 초 만에 터널이 막혔어요
괜찮은 척 애써도 어떻게든
터널은 뚫리지 않았어요
영영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적 없으니 만나야 했어요
속은 한번 상하면 돌이킬 수 없어서
아껴야 하는데, 이미 돌이킬 수 없어서
목요일은 잔뜩 풀이 죽어야 했어요
당신은 왜 일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외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제법 멀리에 서서
되도록 비좁은 자리에 서서
가능한 한 당신이 없는 길에 서서
겉보기에만 괜찮은 표정으로
남 좋은 일 시켜줍니다
「서운한 감정은 잠시라도 졸거나 쉬지 않네요」
이 시는 추억과 미련, 복잡한 감정, 그리고 용서와 고통에 대한 내용을 담아내 줍니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지치고, 미련이 여전히 곁에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지만,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고통을 겪는 과정을 담아낸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시집은 시마다 제목이 다 재밌고, 시인의 섬세한 시선과 솔직 담백하게 표현한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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