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오늘 소개할 시집은 김행숙 시인의 《에코의 초상》이라는 시집입니다.
이 시는 김행숙 시인만의 모호하고 매력적인 묘사가 두드러지게 잘 나타납니다. 김행숙 시인은 《에코의 초상》 이외에도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이별의 능력》 등 많은 시집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제목에서 나오듯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마지막 말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에코'의 운명을 시적 자아의 초상으로 받아들이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세상의 모든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 일 속에서 끝내 가닿을 수 없는 타자의 경지와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 경계에 서서 자책하는 모습을 통해 '타자'와 '나'라는 존재의 한 끗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좋았던 시의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너의 주위는 몇 개의 눈동자가 숨어 있는 떨기나무 같은 것. 가시들은 눈동자의 것. 덤불의 것.
너의 주위는 밝다.
하루 종일 불을 켜두었다. 시간은 인공호수 같다.
열두 시간과 열두 시간이 똑같았다. 사랑은 어둠을 좋아했으므로 사랑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된다.
「낮」
이 시는 단시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라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집니다. 시인은 여기서 열두 시간과 열두 시간이 똑같았다고 표현하면서 시간은 인공호수 같다는 표현을 통해 고인 공간 안에서 시간이 반복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은 어둠을 좋아했으므로 사랑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된다는 문장을 읽고, 사랑은 항상 밝지만은 않기에 어둠 속에 가려진 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의 이면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날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같았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낮'인 것으로 보아. '밤'이라는 배경에서 '사랑'이라는 한 줄기 빛을 찾아 헤매는 것을 담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하고 싶은 시는
고딕체 같다.
고딕이란 무엇입니까.
돈을 빌리면서
당신이 쓴 각서에서
죽어도 좋다고 했고, 한 번 더 죽어도 좋다고 했다.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한 번 더······· 하면서 발가벗은 채 변기에 앉아 있다.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타일과
똑같은 리듬으로 읊조리면 머지않아 잠에, 잠에······· 빠져들어 알 수 없는 사람이 될 것 같다.
언뜻
목이 조금 길어지는 것 같았다.
좁은 목구멍에 그 무엇이 꽉 끼어 있는 것 같다.
「타일의 규칙」
이 시는 도입 부분에서 ‘고딕체 같다.' '고딕이란 무엇입니까.’로 시작돼서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4연에서 ‘타일과’라는 단어가 행에 따라 하나씩 더 늘어나고, 반복되면서 마치 타일 조각을 하나씩 붙이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좁은 목구멍에서 그 무엇이 꽉 끼어 있는 것 같다.’는 마지막 문장에선 답답한 현실에 처한 타자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김행숙 시인의 이 시집은 끝내 가닿을 수 없는. '타자'와 '자신'의 존재 경지에 서서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들이 많아서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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