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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홍지호

by young poet 202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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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홍지호 시인의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라는 시집입니다.

홍지호 시인은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슬픔을 마주하는 일, 그 고요한 위태로움을 담은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땅에서는 걸을 때마다 
개미들이 죽었다 

쓰고 
지우지 못한 문장들과 

지워지는 방식으로 웅성거리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2020년 9월
홍지호-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삶의 장면들 속에서 사라지고, 지워지고, 다치며 살아가는 이들의 안부를 묻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바람은 어딘가에서 쏟아진 마음이라는 말
책임질 수 있니

쏟아졌으므로 기억할 수 있다는 말도

아스팔트 위로 쏟아진 물이 빠르게 증발하고 있었습니다
속성을 벗어나 속성으로 증발하는 것이
쏟아진 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습성입니다

건조한 계절입니다
매달려 있던 것들이 낙하하는 것입니다
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건조해지는 계절입니다

바람이 크게 불면 후두둑 잎이 떨어지고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은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쏟아지면서
물이 쏟아졌던 자리는 이제
유별나지 않아 보입니다

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물이 쏟아졌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쏟아진 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습성입니다

「토로」 

 

이 시는 감정의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그것을 기억하고 붙잡으려는 인간의 애틋함과 잊지 못하는 습성에 대해 조용하고도 철학적인 고찰이 담긴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말에
어차피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나는 가끔 생각으로 죄를 짓기 때문에
생각이 생각에서 멈춰야 했다

가로수들의 간격이 일정했다
비슷한 크기로 자라고 있었으나

동일한 지점을 같은 시간에 당도한 차량들의
파편이 굴러다녔다
운전자에게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는 말은 하지는 못했다

함께 있을 때 너는 이제 와서 뭘 어떡하니 자주 말했지
도로에 적절하게 늘어선 가로수의 간격을 헤집고 다니면
서 우리는
굴러다니는 파편들을 발로 차는 놀이를 했다

간격의 기여를 우리는 몰랐지

우리는 간격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충돌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뿌리는 자라지 못했습니다

굴러다니는 파편들을 걷어차면서
가로수의 간격 속에서 충돌을 가늠하면서

나는 생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다
너는 내가 지은 아직까지 가장 큰 죄악이다

파편들은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지

그러므로 파편이겠지

「씽크홀」 

 

이 시는 '감정', '기억', '관계', 그리고 필연적인 충돌에 대한 복잡한 내면을 '싱크홀'이라는 상징을 통해 담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커튼을 치면 어두워졌다
 
 알고 보면
 그건 슬픈 일이다
 
 사고로 딸을 잃은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어린아이가 된 거 같다며 웃는 아저씨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진다는 생각이 스쳤고
 죄책감을 느꼈다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별수없이 좋아하는 음식의 종류가 늘어나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해도
 꽃들이 자꾸 피어날 시간이 있었다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들이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행성을 생각했고 작지 않다고 생각했다
 먼지는 언제나 떠다니고 있었어도
 
 누군가의 커튼 사이로
 빛이 통과하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의 행성에서는 떠다니지 못하는 기차
 사람들이 가득했다
 
 빈 좌석들과 상관없이
 
 기차는 조금도 지연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모두
 슬픈 일이다
 
「정시성」 

 

이 시는 일상적인 풍경과 사소한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슬픔과 상실, 그리고 그 슬픔을 담담하게 견디는 인간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합니다. 커튼을 치면 어두워지는 단순한 사실조차 슬픔으로 느껴지는 감정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딸을 잃은 한 아버지의 웃음 속에 숨겨진 아픔,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계절과 삶의 흐름 속에서 문득 스치는 죄책감을 섬세하게 포착한 시 같았습니다.

 

 

홍지호 시인의 《사람이 기도를 울게 하는 순서》라는 이 시집은 슬픔과 존재,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해주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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