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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나쁘게 눈부시기》-서윤후

by young poet 2025.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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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서윤후 시인의 신작인 《나쁘게 눈부시기》라는 시집입니다.

서윤후 시인은 《휴가저택》, 《소소소》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눈부신 상실과 다정함을 품은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나는 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 

-2025년 4월
서윤후-

 

악몽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그 고통을 글로 써서 멀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온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그게 벌어진 모든 일의 이유가 될 수 있었지만
손전등의 쓸모가 될 순 없어서
어둠을 켜는 진눈깨비 막 쏟아지고
작고 좁은 보폭이 나를 뒤따라온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 본다

경적을 울리며 차들이 나를 지나친다

「흑백판화」 

 

이 시는 조용한 감정 속에서 슬픔이나 외로움을 말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 다 드러나는 시 같았습니다. 그리고 특히 3연의 문장 표현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사랑의 천재는 태어나 딱 한 번 실수를 했다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고
그에게 수모를 안겨 주며
나는 부활했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랑의 천재인 줄 모르고 낳아 기르던 부모의 곁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정말이지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대답해 줄 사랑의 천재는 사라진 후였고 어쩌면 거긴 먼 곳이 아니라 너무 가까운 곳 같아서
내 사랑에 비켜선 채로 변명이 듣고 싶었다 이제부턴 변명의 천재로 살게 해 줄 테니

사랑은 절대 홀가분할 수 없단다
지금 그의 안락함은 불침번이 잠깐 잠든 틈과 다르지 않지 꿈의 재료로 비밀을 포대로 나르다가 진실에 자꾸 쏟게 될 설탕을 흘리다가 그는 잠깐 거짓말을 구하기 위해 잠들었을 것이다

사랑에 걸신 걸린 것들이 사랑의 천재가 된다
실패를 의외로 빠르게 끄덕이고는 바라보는 사람을 커다란 과녁으로 두는 것이다 나에게 쏟아진 화살과 뽑아낸 자리의 구멍
사랑의 천재는 이미 잊었겠지
기억력이 나쁜 천재를 믿을 수 없었지만

그땐 나도 천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잡화점 단골이 되어 선물을 고르고 엽서에 태어나 처음 고백을 적고 한 자루의 총을 건네며 총알은 다음에 줄게
기대하게 만드는 선물을 건네며 거의 다 알게 된 비밀처럼 내 소개를 하고 싶었지

나의 고향에서도 슬픔을 환영하곤 했다 다 꿈에서 본 것들이었지만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하며 사는 이들의 무대
천재가 아니었던 적 없는 사람들만 사는 곳의 주소를 잊기 위해
나는 그에게 명중되기를 바란 적 있지

사랑의 천재를 다시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내 부활도 점점 사랑으로 희박해지겠지
총알을 소포로 부치며 얄궂게 웃어 보자 빗맞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의 일환이라면
나, 사랑의 천재를 사랑한 적 있지

「사랑의 천재」 

 

이 시는 사랑의 실패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어떤 식으로 다시 자신을 회복해 가는지에 집중하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천재'라는 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픈 표현으로 가장 사랑에 능한 이와 동시에 사랑을 가장 아프게 망치는 사람이 되는 이중적인 모습이 잘 표현된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양생 중인 바닥을 갖고 싶다
지금은 도착에 대해 생각 중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떤 무지가 될래?
약속에 늦는 사람은 내 기다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어둡고 깊은 곳에
나는 먼저 와 물을 따르는 사람
매일 시동 거는 꿈을 뒤척이고
난분분한 바닥을 짐작했으며
떨어지는 법을 쌓아 추락을 지연시킨다

들이닥친 빛 한 줌
내가 누비던 바닥을 훤히 비췄을 때
내 손바닥 자국을 누더기로 쓴 악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서

먼저 갈게
말하고 여태껏 진동하는 심장

나는 몇 시간째 양생 중인 바닥을 보는 중이다
우리 산업의 도착은 콘크리트 
끝없는 나락 속에서도
사랑의 반죽을 치대고
누가 나를 낳았던 깊은 지하에도
휘갈긴 우중충한 사랑이었고

그 후로 나는 도착하지 않는 생각이다

흐드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자국
하나 살며시 남기고는
신발 밑창을 다시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나아가는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어진다
약속에 늦게 나타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하자
자꾸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고

그가 나를 근처 스키야끼집이나 우동집에 데려가면
나는 뜨거운 국물 앞에서
양생 중인 바닥을 잊고 만다

그건 내가 지워지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뜻

「미도착」 

 

이 시는 자기 자신이 ‘도달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양생 중인 바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불완전한 자아 혹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으로 그것을 '사랑', '기다림' 이라는 단어로 풀어쓴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윤후 시인의 《나쁘게 눈부시기》라는 이 시집은 서늘하지만 다정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생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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