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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당근밭 걷기》-안희연

by young poet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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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라는 시집입니다.

안희연 시인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감각의 조각을 모아서 발자취를 따라가게 만드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너의 왼팔을 가져다 엉터리 한의사처럼 진맥을 짚는
다. 나는 이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같아. 이 소리는
후시녹음도 할 수 없거든.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
밀을 함께 듣자.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물잔
을 건네는 마음으로. 

-2024년 6월
안희연-

 

슬픔과 고독 속에서도 삶을 계속 이어가고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며, 작은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담아내고 있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 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저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 가위」 

 

이 시는 슬픔 속에서 인간의 내면적 갈등을 담아내며 고통을 감수해야만 진정한 이해와 치유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사과파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날들입니다

진심을 다하려는 태도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고
멀리 두고 덤덤히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으로 갈린 사과파이가 간곡히 품고 있었을
물컹과 왈칵과 달콤,
후후 불어 삼켜야 하는 그 모든 것

사과파이의 영혼 같습니다
나를 쪼개면 무엇이 흘러나올지 궁금합니다

쪼개진다는 공포보다
쪼갰는데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공포가 더 크지만

밤은 안 보이는 것을 보기에 좋은 시간일까요 나쁜 시간일까요

사실 나는 나를 자주 쪼개봅니다
엉성한 솔기는 나의 은밀한 자랑입니다

아무도 누구도 아무도
들어 있지 않은

반대편이 늘 건너편인 것은 아니라고
속삭이는 문

결말은 필요 없어요
협곡을 뛰어넘기 위해 필요한 건 두 다리가 아니에요

여기 이렇게 주저앉아
깊어져가는 계단이면 돼요
단춧구멍만한 믿음이면 돼요

「미결」 

 

이 시는 '사과파이'라는 상징성을 사용하여 자기 탐구와 정체성과 고독, 그리고 삶의 복잡성을 담아내며 작은 믿음과 현재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강조해 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호수, 마음의 푸른 멍>이라는 그림을 봤어요
눈에서 떨어진 것이 파랗게 고여 있었어요
파랗구나, 참 파랗구나 골똘해지는데
지금껏 내가 파랑을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걷게 되는 날이 있어요
거리를 걷는데 마음을 걸어요
마음이 길이구나
마음이 놀이터고 전봇대고 표지판이구나
알게 되는 날이 있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 종 같은

개나리 개나리
개나리는 어쩌다 개나리가 되었을까요
내 마음음이 지옥인 것에 이유가 없듯
종이비행기의 추락과
깨진 유리창 사이에도 아무 연관은 없겠지만

나는 불투명하고
오늘 처음 파랑을 배워요
장작처럼 쌓여 있는 파랑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매달린 파랑
그런 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해도 상관없어요
파랑은 그물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물고기

양동이를 뒤집어쓰고 부르는 노래
가만히 가만히
내가 나를 들으면 돼요
파랑은 총성이 울리고
출발선에 서 있는 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해는 지는데

나의 절망은 가볍고
슬픔은 뻣뻣해요
구겨볼까요 던져볼까요

서둘지 않아요 어차피 갈 곳도 없으니까

파랑이에요 트럭 아래 숨어 멍하니 이쪽을 보는
검은 개의 슬픈 눈
운동화 끈이 풀린 채 걸어가는
사월의 달빛에 대해서도

이제 나는 그것을 파랑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내가 나를 일으켜 걸어요 숨지 않아요

「파랑」 

 

 이 시는 감정의 복잡성과 내면의 고통을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정을 담아냅니다. '파랑'이라는 색은 이러한 감정의 상징으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선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안희연 시인의 《당근밭 걷기》 이 시집은 경험을 통해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여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표현해 주고, 더 넓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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