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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김이듬 시인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시집입니다.
김이듬 시인은 2001년 『포에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창작에 대한 발자취를 남겨주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계절이 바뀌니
좋은 것도 있다
여행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끝나지 않는 것
그러니 친구여,
길게 가보자
-2024년 12월
김이듬-
친구에게 긴 여정을 함께 하자는 말로, 삶의 길고 다양한 경험을 함께 하자는 의미를 담은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눈발은 눈이었을 때 아름답다
쌓인 눈이 눈석임물 되었다가 얼어붙으면 가장 위험하다
눈이 그쳤는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설원이 녹고 있다
도로와 개펄이 드러난다
항구 기능을 상실한 저 월곶 포구에는 아침 어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침, 눈, 엄마
에밀리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도 좋아한다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
에밀리는 기지개 켜다 말고 베개를 껴안으며 말한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나랑 닮았겠지?
죽진 않았겠지?"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한국에 온 에밀리와 난생처음 시흥에 온 나는
을씨년스러운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마전저수지 사거리에서
에밀리가 양팔을 벌린 채 돌다가 웃다가 넘어진 건 해가 질 무렵
"히죽거리며 말하지 마, 에밀리!"
"그럼 울어야 되겠어?"
뜨거운 물에 빨아 널어 둔 장갑은 수축되어 작고
어제 입었던 스웨터는 여태 축축하다
작년에 룸메이트가 던진 말이 떠오른다
실수로 놓고 가는 줄 알고 챙겨 준 물건들이었다
버리기는 그렇고…… 너 가져
갖기 싫으면 버려 줘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희고 부드러운 눈밭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장갑도 껴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에밀리가 태어난 곳을 향해 간다
생후 8개월 동안 살았던 곳을 향해 춤을 추듯 걷는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던 검은 승용차가
반 바퀴 돌며 도로를 벗어난다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서 뭐 할까
범인을 잡는 데 회의적인 소설 속 형사는 이해가 되지만
회의적인 가이드이자 친구로서의 나는 우리의 행방을 모르겠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 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블랙 아이스」
이 시는 과거의 상실과 현재의 어려움 그리고 변화하는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에밀리가 엄마를 찾는 여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여정이 아니라 감정적인 여정을 상징하며, 자신과 과거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표현하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해질녘 남쪽 해변에 도착했다
맨발로 갯벌 밟으며 바다 가까이로 걸어갔다
파도에 온종일 들떠 있다가
물이 빠지자 바닥에 내려앉은 부표 옆에서
나는 노을을 기다렸고 너는 고둥 잡자며 주머니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고둥이 맞아?
여기 많다
고동이 맞는 말이야?
지금이 간조야? 만조야?
너는 뛰어다니며 큰소리로
내게 묻는 건지
자신에게 묻는 건지
정작 물어보니까
헷갈리잖아
어두워가는 갯벌 위엔 길지 않은 금이 많다
금을 따라가면 고둥이 있다
길인지
흔적인지
자취인지
생존 발각될 단서인지
고둥이 금을 그으며 기어가고 있다
고둥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고 있다
부득이 나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이토록 오래 고둥을 응시한 적 없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급격하게 해변을 덮고 있다
모든 발자취도 바닷물에 깨끗해지겠지
빈 비닐봉지가 후덥지근한 바람을 싣고
온몸으로 날아오른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이 시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연결하여 변화와 덧없음, 그리고 작은 순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극장에서 돌아와 글을 써요 나는 지저분하며 조그마한 구역에 살아요 항상 떠날 궁리를 하죠 안정감이 밤물결 소리를 내며 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나를 여기 데려다 놓고 데리러 오지 않는 사람이 혹시나 들를지도 몰라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 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 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커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 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 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그렇습니다 맞은편 복도로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오죠 나는 밤새 책상을 부여잡고 표류한 셈이죠 그게 제 역할 같아요 나는 어떤 게 명작인 줄 몰라요 멕베스 세트장에서 내게 말했죠 그래도 너는 순정을 가졌잖니 대표님 순정부품 같은 말씀 마세요 너무 비싸거든요 눈을 뜨면 나는 뜨면 나는 조그마한 구역의 무대 뒤에서 뜨거운 조명을 만지고 있습니다
「밤엔 명작을 쓰지」
이 시는 고독한 창작 활동과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저분하고 작은 공간에서 밤새 명작을 쓰기 위해 노력하며 멕베스 세트장에서의 대화는 내면의 순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이듬 시인의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시집은 창작의 열망을 깊이 있게 탐구하게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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