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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버리기 전에 잃어버리는》-구현우

by young poet 2025.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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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구현우 시인의 《버리기 전에 잃어버리는》라는 시집입니다.

구현우 시인은 2014년 <문학동네>로 등단했으며 《나의 9월은 너의 3월》, 《모든 에필로그가 나를 본다》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안부 인사처럼 담담하게 풀어낸 시집 같았습니다.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좋을까요 지난주엔 제 영혼의 반쪽 같은 친구의 생일 파티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영혼이 많은 친구를 배려해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뜨겁고 캄캄한 아메리카노를 베이지색 코트 소매에 살짝 쏟았습니다 얼룩이야 남겠지만 그 정도로 그쳐서 다행입니다
저는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23일에는 질서 정연하게 도로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지 않아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하늘의 별들 대신 너무 많은 빨간불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펜 뚜껑을 찾았습니다 실내 슬리퍼 안쪽에 있더군요 이미 오래전에 펜은 버렸습니다만 펜 뚜껑은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어떤
쓸모는 딱히 없더라도요

사회인들이 한창 바쁠 오후 두 시에 잠에서 깨곤 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불은 계속 덮은 채고요 오늘의 날씨를 검색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약속이 없어서 그런 건 상관이 없는데
저는 당신이 걱정한 것보다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괴물은 나오지 않고 비극이 아니라면 비극이 아니지만 다른 제목이 붙을 수는 없다고
거장의 피아노 소리가 네버엔딩인 크레디트 내내
실감했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제 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더 고통스럽지는 않은 걸 보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가을에는 로또를 샀고 늘 그랬듯 당첨 번호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변곡점은 지금이 아닙니다
저는 사무치도록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유통기한이 꽤 지난 주스를 마시고 앉아 슬픔 비슷한 것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죽음에 이르진 못해도 죽음에 가까워지진 않았을까요 저는 매번 단순하고 어렵게 달력의 다음 장을 넘기곤 합니다

없는 고양이가 털을 날리고 없는 고양이가 선반을 무너뜨립니다 없는 고양이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없는 고양이와 함께 잘 지내고 있습니다

노크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눌어붙은 인류애 같은 것을 문지르다 보면
미약하게나마 시간이 가고
저는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일상의 작은 사건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상실, 그리고 안부를 담아내며 일상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묘사하여 삶의 복잡성과 감정의 깊이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서울에 집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맨발로 전국 일주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치를 한다는 소리도 아니고 언제까지 물만 마시고 버틴다는 오기도 아니고 서재에 꽂힌 책을 다 읽겠다는 것도 아니고 불의 발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니고 해안가에 별장을 짓겠다는 것도 아니고 묵언으로 수행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삼시세끼 쌀밥만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심해생물과 언어적 교감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옷을 그만 살 거라는 말도 아니고 가족과 연을 끊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십 대 삼십 대 아니면 사십 대 오십 대에 성공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성공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수 백 광년 떨어진 행성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편식을 고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방에 들어온 모기를 잡겠다는 것인데

백이면 백 그것만큼은 실패할 거라고

「백이면 백 실패할 거라고」 

 

이 시는 다양한 목표들을 열거하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들과 비현실적인 꿈들을 나열합니다. 서울에 집을 사는 것부터 전국 일주, 정치, 모든 책을 읽는 것 등 다양한 목표들이 현실적이지 않거나 과장된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온 모기를 잡는 아주 작은 목표를 언급하며 이조차도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잠에서 깨고 말았습니다 생각 하나가 나를 불쑥 일으켰습니다 유리창은 까만 화면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제의 일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 얘기를 꼭 해야만 했을까 십 년 전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릅니다 유리창에는 한 편의 드라마도 상영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래된 어떤 연속극처럼 보입니다 이 시간에도 소음이 있군요 소리는 끊이지 않는군요 다시 자야만 합니다 나는 하루를 더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잠이 긁힙니다 나의 잠이 내게 오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의 표정이 생각날 뿐입니다 미안하다고 해야지 미안하다고 속으로 사과합니다 유리창을 보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감상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만 겨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자라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이 시는 깊은 밤이나 새벽에 깨어난 불안한 마음을 표현해 줍니다.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외부 세계는 어둡고 정적인 반면, 화자의 내면은 과거의 기억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으로 혼란스러움을 담아내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구현우 시인의 《버리기 전에 잃어버리는》라는 이 시집은 현대 사회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그 속에서의 큰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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