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김중일 시인의 《가슴에서 사슴까지》라는 시집입니다.
김중일 시인은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작품 활동을 했으며,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튼 씨 미안해요》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가슴'과 '사슴' 한 끗 차이인 단어로 가슴에서부터 발화되어지는 것들을 끌고 가 풍경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날 배웅해준 아버지와
아주 먼 미래로부터 한생을 되짚어 날 마중 와준 딸에게.
-2018년 7월
김중일-
삶과 죽음, 시간의 흐름, 세대 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감정을 담고 있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세상은 매일 매 순간 무너지려 한다.
한순간도 천지사방은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한순간에 무너지고 우주가 쏟아질 수 있다.
세상 모든 새들은
잿빛 댐처럼 우주를 가둔 하늘을 틀어막고 있다.
하늘이 터져 지상이 우주로 뒤덮이지 않도록.
새들은 일생 쉼 없이 우주가 흘러나오려 하는
제 몸피만큼 작은 바람구멍들을 계절마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날아다니며 틀어막고 있다.
새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우주가 새어나와 지구가 침수되고
집들과 배들과 별들의 깨진 창문 같은 잔해가
둥둥 떠내려왔다가 떠내려간다. 떠내려가다가
흘러내려가다가 고인 곳, 봉분처럼 쌓인, 고인의 곳.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잿빛 댐처럼 지구를 가둔 땅을 틀어막고 있다.
땅이 터져 우주가 지구로 뒤덮이지 않도록,
사람들은 일생 쉼 없이 지구가 흘러나오려 하는
제 발자국만큼 작은 땀구멍들을
매일매일 시시각각 발바닥 닳도록 서로 오가며 틀어막
고 있다.
엄마들은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순간 한 순간에 세상이 무너질까봐
그 자리에 곧바로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는다.
지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폭발해 터져나오려는
그 순간 그 자리를 틀어막듯 주저앉는다.
단 한 걸음도 더 내딛지 못할 순간이 왔다.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온 힘이 빠져나간 순간이 왔다.
이제 어떡하나, 엄마들 가슴 한가운데 난 구멍을.
당장 막지 않으면 금세 금가고 갈라져 댐이 툭 터지듯
한 순간 무너져내릴 텐데, 세상이 엄마로 다 잠길 텐데.
세상 모든 사람들 물살에 무릎이 부러지고
막지 못한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온몸이 줄줄 다 흘러나
올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기적을 기다리며
매순간 무너지려는 길의 틈새를
매순간 무너지려는 공중의 틈새를
천지사방을 이 시간을 온몸으로 막으려
죽어서도 그들은 여기에 서 있다.
「매일 무너지려는 세상」
이 시는 존재의 불안정함과 그 속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 그리고 서로를 지키려는 노력의 연대감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통해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어느 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
내 사슴은 어쩌나.
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 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
짝 내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 사는 사람의 가슴.
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 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
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
은 나뭇잎 한 장 남김없이, 내 가슴팍에 앉아 사슴은 다 먹
어치운다. 그렇다고 이 계절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
는걸 붙잡아놓을 수도 없다.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
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
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
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마리 사슴 두마리 사슴 세마리…… 아무리 백까
지 백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가슴에서 사슴까지」
이 시는 상실과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고, 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사슴은 상징적인 존재로 고통과 상실의 감정을 나타내며, 동시에 새로운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존재를 표현한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걷는다.
폭우 속을.
나무젓가락처럼 부러질 듯 휘청이는 깡마른 두 다리로,
번번이 미끄러지는 젖은 지구를 밤새 집어올리려는 듯.
나를 불렀던 목소리들 모두 모이면
빗소리.
빗소리 속을 걷는다.
빗물이 창문마다 깊은 주름을 만들고,
폭우 밖으로 웃자라 바람에 부러진 빗줄기가 젖은 나무
젓가락처럼 식탁 모서리에 놓여있다.
식탁 가득 날것의 생생한 목소리들이 차려져 있다.
나를 불렀던 목소리들은 모조리 찍히고 꺾이고 부러져
있다.
너무 뜨거워 일어나면 침대 밑에 나를 불렀던 목소리들
이, 쪼개진 장작처럼 가득 쌓여 불타고 있다.
이미 흠뻑 젖은 폭우 위로 쏟아지는 폭우.
내 귀까지 완전히 잠기도록 비가 온다.
날 불렀던 모든 목소리들이 밤새 온다.
잠처럼 모르는 새 온다.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다.
그날 등 뒤에서 나를 부르던 소리.
돌아본다.
우산 하나만 눈앞에 떠 있다.
내가 가진 적 있는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온다.
바람 소리.
떠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뒤섞여 밀려온다.
내 발등에서 엎어지는 파도 소리.
바다에서 비가 온다.
나를 부르고, 그리고 꾹 다문 창백한 입술처럼 바다와
하늘이 달라붙어 있다.
바다보다 더 큰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흐르고 있다.
그 바다에서 나를 불렀던 목소리들이 동시에 울리면
구름이 흔들리는 소리.
돌아가는 차창을 구름이 통과한다.
「목소리들」
이 시는 폭우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잃어버린 목소리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내 줍니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느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과정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김중일 시인의 《가슴에서 사슴까지》 이 시집은 솔직한 어조로 담담하게 가슴에서 사슴까지의 또 다른 세계를 담아낸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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