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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심재휘

by young poet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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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심재휘 시인의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이라는 시집입니다.

심재휘 시인은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하였으며,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용서와 치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용서'의 쓸모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길에 떨어져 터진 버찌들을 보면 
올려다보지 않아도 내가 지금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등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보리 추수는 이미 지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오래다. 
보리서리를 눈감아주시던 외할머니의 
거룩한 삶이 대관령 아래에 있었다. 
검은 흙 속에서 
감자가 익으면 여름이라는 것을 알 듯 
내 몸이 강릉에 가고 싶을 때가 많다. 
강릉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2018년 8월
심재휘-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에 대한 표현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을 바라보거나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후로 노을이 몇 번 더 졌을 뿐인데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기적」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을 표현하면서도 그 기억 속에서 삶의 희망을 찾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장마가 끝난 하늘은 너무 맑아서
너무 멀리 온 것이 드러난 구름
감추어 둔 말을 들켜버린 저 한 줌의 옅은 구름

전하지 못한 말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흘러와 버렸구나
괄호 속에 혼잣말을 심고
꽃피지 못하는 말들에게
가시같은 안대를 씌워야 했구나
차라리 폭풍의 지난밤이 견딜 만했겠다
천둥 소리로 가슴을 찢고 자진할 만했겠다

하지만 장마 갠 하늘에
흩어지지 못한 구름 한 점이여
숨을 데 없는 하늘에 들켜버린 마음이여
너무 넓은 고요를 흘러가다가 뒤를 돌아볼까봐
구름에게 나는 몇 마디 중얼거려본다

마지막 사흘을 퍼붓던 비가 그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면
이제는 페이지의 접혀 있던 귀를 펴야 할 때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그 문장들 아래
없는 밑줄도 이제는 지워야 할 때

「밑줄을 긋지는 않았지만」 

 

이 시는 장마가 끝난 후의 맑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통해 감정적으로 얽혀 있는 미련과 아쉬움, 전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상념을 표현해 줍니다.  또한, 과거의 감정에 묶여 있으며, 전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느끼고 있지만 장마가 끝난 후 맑은 하늘처럼 이제는 그 감정들을 마주하고 정리할 때가 되었음을 표현해주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비가 들이치는 노량진 수산시장 초입에
어물 가게 간판이 가당치 않게 망향수산이다
북해의 고등어와 오호츠크해의 명태와
늘어진 중국산 낙지를 좌대에 내어놓고는
비린내 나는 수사처럼
정말  파리를 날리고 있다
낯선 억양의 여인이 그렇게 앉아 있다

..........

그런 건 소설가나 하는 짓이다 싶어
손질한 생선 한 손 전해 받는다
가질 수 없는 내장은 남겨두고 출구를 나선다

「시」 

 

구체적인 풍경과 사건들이 마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 더 깊은 상징적 의미들을 내포하여 '시'라는 시제에 맞춰서 흥미롭게 쓴 시 같았습니다. 

 

 

심재휘 시인의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이라는 이 시집은 '용서'의 힘과 그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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