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채호기 시인의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라는 시집입니다.
채호기 시인은 1988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했으며, 《지독한 사랑》, 《손가락이 뜨겁다》 등 시집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인식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마주하는 단어들을 반짝이는 언어로 담아내서 윤슬 같은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호흡에 집중하기.
몸에서 빠져나와 언어로 행동하기.
채석장 돌산 (언어는 독립적이다),
깨어져 나뒹구는 언어와
(판 아래 보이지 않는 자력에 쇳가루가 끌리듯)
부서져 흩어진 나들의 회집
의 상호관계, 분리한
몸과 언어의 새 종합.
-2018년 11월
채호기-
자아의 분열과 언어의 독립성을 담아내며 그 속에서 부서진 자아가 언어를 통해 다시 모여드는 과정을 묘사해 주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내 눈은 흠집이 나고, 한쪽이 우그러진 창이다. 창밖의 건
물이 찌그러지고 수직으로 솟은 나무의 가운데 부분이 수
평으로 길어진다.
눈을 열고 싶다. 어떤 목소리가 손닿지 않는 곳의 창이라
열 수 없다고 말한다. 손도 마음도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의
눈은 무엇을 내다보는 것일까?
나의,
내가 닿을 수 없는 내부,
그것은 내게서 등 돌려 잠자는 너일까? 너의 등은 아무것
도 내다보이지 않는 창이다. 창밖의 흐릿한 어둠은 부드러
운 분말로 쌓인다. 그걸 쓸어내거나 훅 불어 날리고 싶다.
하지만 너의 등은 열 수 없다.
열 수 없는 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까맣다.
까만 화면에 희끄무레한 무엇이 유령처럼 공중에 떠 있
다. 나무에 걸린 천 조각, 구름 가운을 걸친 달인가?
창밖에 내걸려 있는 희번덕이는 생각일까?
눈을 열고 싶지만, 열리지 않는 눈은 속수무책으로 베이
컨의 초상화들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영사한다.
“내 속의 네가, 열 수 없는 내 눈을 열고, 열리지 않는 너
를 마주본다.” 라고 낮게 들이마시며 말하는 어떤 목소리가
창에 부딪혀 흩어진다.
「눈을 이해하는 법」
이 시는 불완전한 인식, 소통의 단절, 자아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자아와 타자 그리고 내면과 외부 세계 간의 소통의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고립감을 시적으로 묘사해 줍니다. '눈', '창', '너'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고독과 소통의 한계를 담아낸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땀이 흐르고
두 숨이 섞이고
두 육체를 하나로 반죽하는 따가운 햇빛.
손바닥을 치우면 잠깐의 눈부심을
밀치며 두껍게 가라앉는 그림자.
눈앞에 노란색 공기를 푸르게
물들이는 비목나무의 긴 팔, 예민한 잎들.
날벌레가 솜털에 앉으려다 날아가고
귓속으로 이명처럼 파고드는 날갯소리.
파리들이 눈꺼풀 위, 콧잔등 위, 팔등 위의
땀에 끈질긴 발들을 적시고
모기가 빛이 닿지 않는 숨겨진
어둠에 주둥이를 깊이 박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맥박 소리와 심장 소리만이
고요를 부수어 잘게 조각낸다.
허리가 휘는 등고선
먹먹한 하늘 바닥 모를 깊이를
배경으로 게으른 구름 몇 조각.
수액을 말려버린 잡풀들이
깡마른 몸을 부딪친다.
「도시 외곽의 시간」
이 시는 자연 속의 고요한 순간을 육체적 감각을 통해 섬세하게 묘사하여 무더운 날씨 속에서 서로의 육체와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고, 그 속에서 '생명'과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가 일어나는 장면을 시적으로 묘사한 시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완전한 어둠에 둘러싸이는 것. 그 어떤 외부도 내부도 없
는 암흑이 되는 것.
암흑은 그저 암흑이기 때문에 더이상 암흑이라고 할 수 없
다. 알 수 없음이고 무이다.
암흑은 무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빛이 필요하다. 암흑뿐
인 데서 빛은 어떻게 나타날까?
암흑은 암흑이 사라지는 구멍, 암흑은 암흑이고, 모든 것
이 사라지는 구멍.
그 구멍이 암흑을 바라보는 암흑의 빛이다.
빛과 신체가 부딪혀 눈을 만들어냈다면
암흑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암흑 마개가 된다.
욕조 밑바닥의 검은 고무마개처럼.
사라지는 구멍을 막는 암흑은 암흑을 바라보는 눈.
「돌을 이해하는 법」
이 시는 빛과 어둠, 존재와 무의 관계를 깊이 담아내며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담아내 줍니다. 어둠은 무한한 소멸의 공간이자 동시에 그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빛을 필요로 합니다.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풀어내어 무와 존재, 인식의 관계를 깊이 성찰하게 해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채호기 시인의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이 시집은 독창적 비유와 이미지, 감각적 표현을 통해 독자에게 시적 세계를 확장시켜 주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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