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김리윤 시인의 《투명도 혼합 공간》이라는 시집입니다.
김리윤 시인은 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소스 리스트 vol.2》 등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독창적인 서사와 시적 언어의 밀도가 돋보이고, 투명한 색채가 혼합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미지가 세계에 뚫린 구멍이라면
그곳을 지나갈 빛이 있다면
-2022년 8월
김리윤-
시적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며 이미지를 단순한 시각적 표현이 아닌,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통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좋았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친구들아
실패하지 않는 사랑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이런 것만이 우리의 소원은 아닐 거야
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
슬픔을 깨뜨리며 슬픔을 기억하기
미래의 불행을 미리 깨뜨리기
깨진 컵을 버리는 여자들과
새 컵을 찬장에 채워 넣는 여자들
우리는 와장창 웃으며 미래로 간다
세상에는 검은 모래의 해변도 있어
백사장이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래를 뭐라고 부를까 골몰할 수
있었겠지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다
뒤로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지네***
우리는 어떤 인과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걷고 웃고 먹고 잠드네
바깥의 여름 속을 걸으면 더위의 인과를 묻고 싶어져
정말 덥다,
여름이니까 덥지
이런 대답 대신
새롭게 열리는 땀방울을
이상한 질감의 피부와 미친 햇빛을
앞사람의 손에 들린 봉지 속에서 흔들리는 복숭아 두
알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 둘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
를 기다리는 것을 본다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
여름 바람이 만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
는 것을 본다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
먼지 속에 숨을 수도 없이 환한 여름에
드러난 사랑의 부스러기들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모두 얼굴이라고 불러
왔네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
「이야기를 깨뜨리기*」
이 시는 삶과 사랑, 그리고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내 줍니다. 또한, 일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감정과 현실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그 속에서 발견되는 다층적인 의미로 사랑, 시간, 현실을 향한 깊은 사유와 함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해 줍니다. 감각적인 언어와 이미지들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겨울에는 옷의 무게까지 견뎌야 해
팔짱을 끼려던 팔을 살며시 내려 손을 잡는다 커다란
오리털 점퍼 끝의 손은 너무 작고 가볍다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게 된다는 말은 너무 흔하고 흔
한 말은 작은 일들끼리 흔해빠질 때까지 모여서 이룬 일
어깨를 맞대고 붙어 서서 맞댄 어깨가 무성해지도록
빛을 생각하면 빛이 거기 있다
강 건너 아파트의 하나둘 환해지는 격자로부터 얼굴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다 얼어붙은 한강의 이편과 저편에
서 오리배 두 마리가 서로를 보고 있다
오리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이 얼음은 모두 부서질 거야
지난 주말에도 광장에는 몇만 개의 불빛이 모였습니다
지워지는 사람들과 남는 빛들 사라지는 온기와 남는 불
들 사람들은 주말이면 오래된 궁전과 오래된 정원 오래
된 돌담 딜을 따라 걷기도 한다 언제고 언제까지 이럴 건
지 모르겠습니다 유턴 차선에서 핸들을 꺾는 주름진 손
이 있다
시간을 견디며 점점 아름답게 완성되어가는 장소와
지금을 갉아먹으며 점점 더 미숙해지는 시간이 함께
늙고 있다
선생님 천국이 준비되셨습니까
아주 먼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란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두 손을 잡으면 너무 좁은 골목만 가득한
옷깃이 다른 옷깃을 파고들 때
찢어진 옷 사이로 젖은 빛들이 쏟아졌다
「모든 사람 같은 빛*」
이 시는 겨울의 차가움과 무게를 중심으로 시간, 관계, 그리고 삶의 복잡한 양상을 담아내 줍니다. 겨울의 물리적 감각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삶의 무게를 형상화하여 일상의 작은 순간들과 상징적인 장면들을 통해 삶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다뤄주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눈을 뜰 수가 없어
세상이 너무 환해져버렸지 낮도 밤도 환하지
이 빛을 견딜 수 없어
너무 잘 보일 것 같아 바스러질 것 같아 다 날아가버릴
것 같아
잘 자렴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꺼주는 손
언제나 불을 켜고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매일 불을 꺼주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눈 뜨고 자는 짐승의 새하얀 눈동자를 덮어주는 손
환한 잠을 덮어주는 아늑한 어둠
손차양이 만드는 대낮 속 한 뼘의 어둠
극장에서 우리는 같은 어둠을 하나씩 나눠 갖네
1인용 어둠 속에서 스크린은
우리를 합친 것보다 커다란 얼굴 하나를 펼쳐놓네
폴라로이드 사진 속의 두 사람
하얗게 날아간 두 얼굴 위의 검은 눈동자 넷
둘 다 활짝 웃는 사진이 남아 있어서 너무 좋다
말하며 웃는 장면
조명이 비추는 쪽으로 돌아보는
어둠에 못을 대고 두드리는
얼굴에 반사된 빛이
우리 모두의 얼굴 위로 드리우고
어둠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너도 카메라를 들어보면 알게 될 거야
빛 속에 무언가를 숨길 수도 있다는 것
도시의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다면 사람의 몸만큼 연
약한 재료도 없을 거야
같은 힘으로 쥔다면 으스러질 것 같은 작은 손을 의식
하면서
「빛의 인과」
이 시는 빛과 어둠, 노출과 보호, 삶의 연약함을 다루며 인간의 내면과 외부 세계의 대립적인 관계를 담아내 줍니다. 또한, 빛과 어둠을 중심으로 인간의 감정, 관계, 기억을 직조하여 섬세한 상징적 언어로 풀어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빛'과 '어둠'의 대립을 예리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리윤 시인의 《투명도 혼합 공간》 이 시집은 투명한 색채들이 혼합되는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다층적인 현실과 그 속에서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해 주며 세밀한 시적 언어로 현대인의 삶과 소통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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