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권민경 시인의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라는 시집입니다.
권민경 시인은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울고 나서 다시 만나》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섬세한 감성으로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고,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기억하고 있을지에 대해서 상상하게 만드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주장: 눈물이 많은 건 인정. 그러나 가려서 움.
이 책의 시편들은 내게서 영영 떨어져나간 것처럼 느껴
진다.
그 시들이
누군가와 쑥스럽고 어색하게 인사하는 걸 상상하면 찡해
진다.
가뜩이나 낯가리는 내게서 떨어져나와가지고!
고생, 고생, 개고생!
내 글을 마주하고 있는 낯설고 반가운 어깨.
감히
머리를 기댄다.
-2018년 12월
권민경-
감정적인 해방과 연결을 갈망하는 모습을 담아내며, 감정이 깊고 다층적인 시인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첫 번째로 소개할 시는
발에 쥐가 날 때마다 불길한 일들이 생긴다. 뒤로 두 발.
앞으로 세 발. 우리의 방향은 동동남. 구두의 끈을 풀고 축
축한 양말을 벗어던진다. 구두의 앞코는 광택을 잃었다. 윗
도리는 쓸모없다. 누런 내복을 입고 침대에 몸을 누인다. 삐
걱거리는 소리. 녹슨 냄새. 스프링은 부스러지고 단단한 빵
조각. 한참 꿈을 꾸고 일어나도 어두웠다.
.........
올이 풀린 양말은 실패에 감는다. 끝없이 풀려나가는 날
짜. 봄철 혹은 가을의 별자리가 외롭고, 어디로 되감기고 싶
은가. 뱃사람들이 빈 하늘에 손가락질한다. 해초가 가득한
바다에 도착할 예정이다. 제자리에 서 있을 예정이다. 뱃머
리의 조각상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날. 어쩐지 몸이 계속
자랄 것 같다.
「소년은 점을 치는 항해사였다」
이 시는 감각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불안과 방황,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변화의 감정을 표현해 줍니다. 발에 쥐가 나는 불편함에서 시작하여 불길한 사건들을 예고하며 전개됩니다. 방황과 혼란 속에서도 변화를 예감하는 순간들을 담아내고 피로와 실패 속에서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성장을 향한 희망을 담아내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커튼 뒤에서 잃어버린 어제를 찾았죠. 베개는 얼마나 많
은 꿈을 견뎌냈나요. 머리맡엔 단단한 구름과 말캉한 악몽
이 쌓이고, 기억들을 팡팡 털어도 베개는 풍성해지지 않아
요. 부풀어 오르지 않아요. 걸어온 길들은 푹 꺼져서 다신 되
돌아오지 않아요.
침대는 흰 배를 내놓고 앉아 있어요. 커튼을 치면 종기처
럼 별이 돋아나고 터진 잠 속에서 깃털들이 솟구쳐요. 재채
기가 나와요. 콧등은 주름지고 우리의 날들도 구겨져요. 지
폐를 구기면 낯선 얼굴이 우릴 바라보는 것처럼 구겨진 삶
이 우릴 바라보고 웃고 울어요. 그 새침하고 가여운 얼굴 속
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눈물도 흘려요.
바뀐 요일을 입으면 기운이 새로 솟아요. 오늘 자고 일어
나면 또 얼마나 열매가 많은 날이 펼쳐질까요.
얼마나 많은 잘린 머릴 목격할까요. 별들이 태어나고 숲이 타오를까요.
이 한잠만 자고 일어나면........
부러진 나무들이 일어나요. 번개가 기지개 켜요. 온 들판
에 불이 일고, 우리의 수많은 잠들이, 꿈들이 하나하나 낯익
은 얼굴이 되어 찾아와요. 못다 한 인사를 커튼 뒤에 감추고
나는 잠들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하루를 생각해요.
「안락사」
이 시는 몽환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현실과 꿈, 기억과 시간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줍니다. 또한, 일상적 사물들을 시적 상징으로 사용해 삶의 무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안락사'를 하기 전 그려지는 일상적인 배경을 섬세하게 잘 담아낸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들의 두 개의 무덤을 넘어
마지막날이 예고된 마야 달력처럼
뚝 끊어진 길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숲 속엔
정수리에서 솟아난 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수많
은 손바닥이 흔들린다
오늘의 얼굴이 좋아 어제의 꼬리가 그리워
하나하나 떼어내며 잎사귀 점 치면
잎맥을 타고 소용돌이치는 예언, 폭포 너머로 이어지는
운명선
너의 처음이 몇번째인지 까먹었다
톡톡 터지는 투명한 가재 알들에서
갓난 내가 기어나오고
각자의 태몽을 안고서 흘러간다
물방울 되어 튀어오르는 몽에 대한 예지
한날한시에 태어난 다른 운명의 손가락
눈물 흘리는 솜털들
나이테에서 태어난 다리에 주름 많은 새들이
내일 말린 두루마리를 물고 올 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점괘엔
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
「오늘의 운세」
이 시는 시간, 삶과 죽음, 운명과 예언을 다루며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나타내줍니다. '어제'와 '오늘', '삶과 죽음'을 반복적으로 대비하여,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담아내고 삶의 순환과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들 속에서 시간과 운명, 그리고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권민경 시인의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이 시집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며, 감동을 주기 때문에 추천하는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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