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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집 소개] 《가능세계》-백은선

by young poet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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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백은선 시인의 《가능세계》라는 시집입니다. 

백은선 시인은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으며,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영원과 하루》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장시로  내부와 외부 세계를 탐구하면서 희망도 완전한 종말도 불가능한 '가능세계'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현실을 넘어서 다른 차원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복잡한 감정과 사유를 세련된 언어로 전달해 주는 매력이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정한 기계들 깊은 밤

투명한 구름 속을 헤맨다면
 
서서히 지워질 수 있다면 

이토록 차가운,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러면 나는 

불 속에서 너를 지켜볼게

-2016년
백은선-

 

감정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이미지들이 떠오르는데, 특히 차가움과 뜨거움, 소멸과 생존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시인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좋았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구름의 그림자
연기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때

당신을 배우려고 먼바다를 건너왔어요
텅 빈 고층 빌딩들이 밤을 견디듯이

층계로 쏟아지는 유리구슬들
얼굴을 참는 얼굴
고백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핏속에서 사라지는
긴 지느러미

그림자가 엉켜있는 골목
손바닥들
서로의 세포에 대고 속삭인다

손등이 가려워요
파도를 끌어와 무릎을 덮을 때

조용한 사람과 더 조용한 사람이 동시에
입을 떼는 순간

「눈보라의 끝」 

 

이 시는 고백을 하기 전 불안정한 감정 상태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열망을 강렬한 이미지들로 풀어내 줍니다.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각 이미지가 던지는 정서와 느낌에 몰입하게 해주고, 미묘한 감정에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동시에 태어난다. 딱딱
한 혀 딱딱한 얼음 딱딱한 세계.
그러면 도래하는 영원.
그러면 증발하는 영원.

  나는 지금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가, 노트를 펼
쳐 단지 지금이라고 적어본다. 지금 옆에 지금, 지
금…… 지금이라고. 그러면 눈 내리는 언덕, 지금은
멀고 아득하고 차가운 사람.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언덕 위로, 어깨 위로, 차갑고 하얀 눈 위로. 다시.

  끝없이 적어 내려갈 때, 그건 그냥 동물 울음소리.
진동하는 공백.

구겨진 종이처럼 하얀 언덕과

  피가 고인 목재 마룻바닥, 두개골을 관통해 액자
에 박힌 활. 그러면 나는 남겨진 입속의 말. 문을 두
들기는 다급한 주먹. 그러면 나는 나의 바깥. 느낄
수 없는 온도.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눈발이 휘몰아친다.
치켜뜬 눈의
마지막 장면.
그러면 그건 커다란 뒷모습.

  가장 먼저 닿은 부분부터 썩기 시작하는 복숭아
처럼.
그러면 이제 당신은 잊혀야 하는 사람.

사랑을 사랑한 공간의 기억은 단단하다.
너무 미끄러워 만질 수 없다.

기울어지는 짧은 감탄사.
나는 처음부터 끝을 잇는 말.
그러면.

  가장 멀리서 손, 가장 멀리서 표정, 가장 멀리서
돌아눕는,

  마른 피의 어두운 빛. 그러면 순리에 따라 처음으
로 돌아가는 작은 손들.

첫 행이 씌어지는 순간 마지막 행도 함께 씌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언덕 너머로 한 사람이 걸어
간다. 그는 파랗게 빛난다. 흐릿한 윤곽, 흐릿한 양
팔, 흐릿하게 이어지는 검은 발자국.

  지금의 호수, 지금의 나무, 지금의 말할 수 없는
파란 빛.

그러면 사라지는 한 사람.

「파충」 

 

이 시는 시간의 순환과 기억의 소멸,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동시성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담아내 줍니다. 시인은 시각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그 끝을 표현하며,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고 잊혀지는 운명을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나는 오늘 새로 태어난 슬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뾰족한 은빛의 체온

눈동자 속으로 풍경이 파랗게 음각될 때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고양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가 쫑긋한 나를 키워준 공포에게
오늘은 노란 무늬 참새를 오려줄 거예요

창백한 공기의 떨림
빛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무한히 부딪치고 있다 구름처럼
말이 없는 모래밭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는
뒤돌아 멀어진다

녹슨 날개, 티포트 안에서
녹아내리는 우리는

서로의 눈알을 만지고 싶어요
청각에 의지해 서로의 실루엣을
가위질하는 붉은 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허공으로 스며들 때
감은 두 눈 위에
종잇조각을 올려주는 작은 손

색색의 천을 덧댄 테이블보 아래
네 개의 다리, 마주 보는 두 소녀
각각의 손에 가위를 들고

「모자이크」

 

이 시는 슬픔, 불안, 상실에 대해 담아내며, 다양한 감각과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해 줍니다. 또한, 이러한 감정들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감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시는 우리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시라고 느껴졌습니다. 

 

 

《가능세계》라는 이 시집은 슬픔, 두려움, 상실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와 내부 세계를 넘나들며 '가능세계'에 닿기 위한 문장들로 표현해 주고, 백은선 시인의 장시를 볼 수 있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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