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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김현 시인의 《호시절》이라는 시집입니다.
김현 시인은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등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삶에 지쳐 잠시 접어두었던 호시절을 생각하게 만드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지난 주말 저는 차게 식힌 멸치다시육수에 삶은 소면을 적셔 먹으며 「봄비」라는 시를 썼습니다. 고향에서 푸성귀를 가꾸며 사는 부모를 떠올리며 아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감실감실 꿈이 참 길었습니다.
깨는 건 한순간.
누구에게나 좋은 시절이 있다고 믿으면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에게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개를 아끼고.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벌하며 살다가도 누군가 먼저 떠나면 크게 울고 만다는 사실이 이 시집에는 담겨 있습니다.
잘들 쓸쓸하세요.
-2020년 여름, 빛
김현-
복잡한 감정을 담아서 우리가 살아가며 때로는 쓸쓸하게 느껴질지라도 그런 감정 속에서도 따뜻한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1
얘,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애는 누구니
희잖아
희
응
걘 작년에 죽었잖아
그러게 죽지도 않고 또 왔네
2
희는 썼다
개강총회에 가고 싶다
가서 씁쓸하게 앉아 있다가 오고 싶다
그래서
희를 보냈다
희는 개강총회에 가서
아는 얼굴이 있나 보았는데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다들 그대로
늙었구나
포기할 건 포기하고
몹쓸 걸 많이 먹고
제대하고 돌아온 복학생들처럼 더러워졌구나
희야
그런 씁쓸한 얼굴은 집에 두고 와야지
어디까지 가지고 와서
이래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고
희는 혼자
자신이 저주받은 학번인지 아닌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복학생 선배는
대학원에 와서도 상명하복으로
빤쓰를 내리고
지도교수 앞에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차렷할까
박교수도 그래
지가 지도교수면 지도교수지
우리가 이삿짐센터 직원은 아니잖아
김교수도 그래
문학상 심사 보는 게 무슨 벼슬이냐
희야
선생이 권력이야
선배 그 냄새나는 얼굴 좀 치우고 말해요
너는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냐
어린 새끼가
어린 희는
개강총회에서 생각했었다
개강총회는 왜 하는 걸까
다 고만고만한 것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하는 듯이
희를 앉혀놓고
95학번 선배는 말했다
등록금삭감투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자본주의의 노예냐
시가 뭐냐
어리고 무식한 새끼구나 너는
신입생입니다 저는
그 선배도 이제는
배가 나오고
아들딸을 낳고
아내 보기를 돌같이 보고
동창들과 동남아로 가서 어린애들과 쓰리썸 할 생각
그런 생각을 가지고
희
너는 왜 매년
개강총회에 오는 거니
같이 망해가는 꼴을 봐야지
3
희는 쓰다 말고
두 손을 모으고
눈부시게 환한 곳을 올려다본다
너는 내 눈을 너의 거울로 쓰는 것이냐
전체가 보이느냐
희는 자신의 전체를 본다
어머니
인류를 거두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희야
그런 냄새나는 얼굴은 집에 두고 와야지
어디까지 가지고 와서
4
이래
희는 썼다
축제에 가고 싶다
중앙 분수대에서 말해줘야지
선배들은 미래에도
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살다 죽어버려
그래서
희를 보냈다
5
영원한 친구
「마음과 인생」
이 시는 인간관계의 씁쓸함과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는 개인의 고뇌와 애환을 담아내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는
영원이라고 썼다
우린 만난 적도 없는데
그해 여름은
우리가 가졌다
미라보 다리가 놓인
편지지는 늘 작고 아득해서
나는 밤새 서성였다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써서 보냈다
말괄량이 철부지
그런데도 여름의 시간은 또 무한히 남아돌았다
인간이 뭔가를 돌이킬 수 없이
망치고 있다는 생각
한낮에는 잠에 빠져 서 있고
한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누워 있었다
세상 모든 책을 펼쳐놓고
꿈에서도
보고 싶었다
너는 내가 여자인 줄 알지만
너는 내 가슴
이 느낌
비를 뿌렸다
그 소리 때문에
나의 거짓됨 밖으로
초록이 드러나서
나는 적었다
분명해 우리는
너는 무서워했다
두번 다시 오지 않았다
「펜팔」
이 시는 상실과 회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복잡한 감정을 다뤄내 줍니다. 또한 수면과 꿈을 통해 불안과 고립감, 끊임없는 후회를 표현한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다 늙은 자식들을
타지에 둔 부모가
영혼을 단속하던 시절의 일
키우던 이 있었으나
버려진 새 한마리를 아버지 주워 와
쓸고 닦은 후에
홀로 두었다
우거졌다
어여뻐라
식물들의 일이란
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러 가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가
마주했다
아버지도 새를 자식처럼 여겨
물 주고 기도하고
이름 붙여준 후에 이름을 잘 보살폈다
해피였다
어머니라면
여름이라 불렀을 것을
아버지가 어머니를 저세상에 둔 건
지지난해 겨울부터 지난해 봄까지
그해 봄 산 너머 뉴타운이 들어서고
아내는 감감무소식
앵두나무에 꽃이 달리지 않아
사람 잃은 아버지의 심정이
자식들 못잖게 어둑하여
마당에 분갈이용 흙이 수북했다
어머니는 식물에 정을 주고
그 정이 든 것을
어느 것 하나 가져가지 못했다
남겨진 자식들에게는 짐이 되고
남편에겐 병이 되던
봄에
도다리쑥국을 밥상에 올리고
쑥이 좋을 때니 먹고 힘내라
다 큰 자식들에게 기별을 넣던 둘이었다
아버지
밥상을 물리고
마당에 화분을 세워두고 물을 주었다
식물을 지나온 물은 참으로 우렁차서
바닥에 무늬를 남겼다
곁에서 소피를 보던 어머니도
참말로 있었기에 망정
어스름한 가운데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서면
해피
쑥이 좋을 때니 먹고 힘내라
아버지는 어디에 올려놓지도 못하는 그것을
허벅지에 올려두고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깨운 건
그로부터 밤낮이 지난 일
마당에 물기가 사라지고
마른 흙 위에
해피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어여뻐라
동물들의 일이란
우거졌다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닫으며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는 대신
앵두를 사 와 앵두주를 만들고
항아리에 담아두고
석달 열흘 앵두를 보았다
흰 새 한마리가
어머니 머리 위에 떨어져서
그것을 함께하였다
이번 비는 반가운 손님입니다만
어머니는 새를 쫓지 않고
받아들였다
아버지 밥상을 물리고
물었다
오늘 밤 몸 섞을까요?
아니요
그럼, 오늘은 편히 자겠소
아버지는 말 잘하는 해피를 칭찬하고
해피는 아버지를 내쫓지 않고
받아주었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데도
부모는 시간이 참 느리다
인생은 길어
살아생전을 그리워하다가
깨닫고는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림을 차린 게 이맘때였습니다만
자식들도 하나둘 죽었다
「좋은 시절」
이 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상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시 같았습니다.
김현 시인의 《호시절》이라는 시집은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감성적인 문체로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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