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라는 시집입니다.
권누리 시인은 201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케이크 자르기》등 많은 시집과 책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직접적인 언어로 감정과 마음을 조화롭게 표현해 줍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여름의 온기와 맞닿아 볼 수 있었던 시집이었습니다.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너를 다시 만나면 네가 있는 우주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함께 있는 동안에 다 웃고, 다
울고. 너무 환한 우주 복판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따뜻한 밀크
티와 단단한 복숭아 조각을 나눠 먹으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
겠다고 다짐했어.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사랑에
게도 일러주어 나는 여전히 신실한 나의 사랑을 데리러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더는 아무도 죽지 마.
말하고 나면 조금씩 단단해지는 지상의 빛들.
-2021년 초겨울
권누리-
'삶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살고자 하는 열망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죽지 않는다면, 소중한 것들이 더 단단해지고 빛난다는 것을 담아낸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나를 모르면서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
는 한 명이 아니고 그들은 집단이 아니고 나는 간혹 기억
되는 듯하고 내가 안다는 걸,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체하곤 한다
화재 경보음을 들을 때, 교통사고 현장의 스키드마크,
영아의 손에 닿지 않도록 높이 달아둔 모빌의 무게, 그것.
부딪히는 소리, 자개장 경첩의 움직임, 접히고 펼쳐지는
라텍스 매트리스, 엘리베이터의 정원 초과 안내 음성, 담
장 너머 라일락 향기, 부드럽게 퍼져 넘치는, 인조가죽 소
파의 광택, 금세 연소하는
불꽃놀이의 빛.
날씨의 기록과 불쑥 자라나는 유령들
가뿐히 넘어설 때 그것 모두 이곳의 나를 뒤돌게 하는
것들이었고 어디서 익숙한 이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건 내 이름이 맞지만 이제 더는 내가 아니에요.
「카메라옵스큐라」
이 시는 존재와 기억,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들은 화자의 내면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해 주고 독자로 하여금 삶의 불확실성과 존재의 연속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식물을 많이 기르는 사람 집에 놀러 갔다. 방 안은 잘
정리되어 있네요. 식물이 살기에 좋은 공간은 사람이 살기
에도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저 침대에 앉아도 되나요? 묻는다.
사실 이 사람 종종 나를 오해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닙
니다. 애초에 도미노라는 건 가지런할수록 거대해지는 것
누가 밀어 넘어뜨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래 외우고 있던 식물의 이름을 소개해줍니다.
안녕,
식물은 말이 없습니다. 실컷 자라나는 일에는 무리가 없
을 테지만,
나는 이제 침대에 앉는다. 금방 오렌지 주스를 내어주겠
다고. 누군가의 집에 있는 잔을 관찰할 때면 기분이 좋았
는데요. 언제나 보여주는 만큼만 이해하고 싶었는데
곤란합니다.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을 데려오고 싶었어,
이런 곳에서도,
라고.
하지만 이곳은 적당히 눈부시고 따뜻하고 건조하고 서
늘하고 틈틈이 그늘진 아름다운 공간
마구 드러눕고 싶어지는 내가 잘 아는 그런 기분
나 이제 거의 자랐지만 사실 가끔은 조금 더 길러지고
싶어요.
「도미노」
이 시는 '식물'과 '인간'의 성장을 비유적으로 연결하며, 공간과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풀어내 줍니다. 성장, 관계, 그리고 스스로의 불완전함에 대해 담아내고 있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 이제 거의 자랐지만 사실 가끔은 조금 더 길러지고 싶어요.' 이 문장이 뇌리에 박힐 정도로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너는 나이 든 토끼처럼 누워 있다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하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새벽이 마룻바닥에 맨발 스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네가 눈을 뜨고 나면
나는 세상 모든 색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어렸을 때 나는 표면으로부터 반사된 빛을 잊기
로 약속한 사람인데, 그렇게 하면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
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불신하는 것들 틈에 가장 확신할 수 있는 것만
내가 쥔 패 안에 골라 넣었다
갑자기 뒤집어도 놀라지 않도록 그러니까 알아
너는 눈 뜨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로부터 깨어날
있어도 네가 꾸지 않는 꿈이
너를 잡아두고 있다
너는 행복할 것이다 내가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
「한여름 손잡기」
이 시는 불신하는 것들 사이에서 누구보다 구원을 갈망하고 있음을 담아내 줍니다. 이 세계에서 불확실성과 상실을 마주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너를,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한 시 같았습니다.
권누리 시인의 《한여름 손잡기》이 시집은 한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그저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감각적으로 문학의 여정을 떠나게 해주는 시집이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여름은 자주 여유로웠습니다. '여유로움'과 '게으름'을 구분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여름 속에선 모든 다 포용 되었습니다.
한여름 속에 더위를 묻힌 우리가 저 멀리 걸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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