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알라딘]
이번에 소개할 시집은 김개미 시인의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라는 시집입니다.
김개미 시인은 2005년 「시와 반시」로 등단하였으며, 《작은 신》,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등 시집과 동시집을 써냈습니다.
이 시집은 아픔 없는 사랑은 없듯이 짙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시집 같았습니다.
시 소개에 앞서 시인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의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17년 봄
김개미-
사랑의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면을 묘사하면서도, 감정의 복잡성을 담아낸 시인의 말 같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시를 몇 편 소개해 보겠습니다.
스물몇 살 때 우리가 가진 거라곤 복숭앗빛 볼과 양말 뒤
꿈치의 감자알 같은 구멍, 곰팡이 슨 냉동 커피, 그리고 유
리창을 깨뜨릴 것같이 가파른 호흡이었다. 좁고 컴컴한 방
에 우리는 분수에 맞지 않게 화려한 거울을 걸었다. 흰 장미
가 둘러진 거울은 수은같이 탐스럽고 위태롭게 빛났다. 우
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거울 앞에 서서 오지 않을 따뜻한
세계를 그려보았다. 가스 같은 입김이 흘러나왔다. 우리의
입술은 말린 표고버섯같이 거칠었지만 우리의 언어는 파티
장을 뛰어다니는 연인들의 것이었다.
노예같이 거칠었던 우리는 내어줄 것이 없어서 고래의 뱃
속과도 같은 허기를 채울 수가 없어서 서로에게 서로를 먹
여주기로 했다. 달아오르던 전기스토브. 토끼의 눈알과도
같이 붉은 불빛 아래 우리는 깡마른 척추를 구부려놓았다.
30년 만에 찾아온 한파가 유리창에 하얀 산맥을 만들고 우
리는 소름에 전 옷을 입었다. 얼음같이 단단한 서로의 눈동
자를 깨고 갈 수 없는 곳까지 헤엄쳐갔다. 우리는 가장 낮
은 밑바닥에서 겨울을 나는 포유류. 선이 벗겨진 코드를 꽂
으며 심장에 화상을 입었다. 우리는 그림자에도 심장이 있
었다.
「네 개의 심장」
이 시는 청춘의 빈곤함과 열정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스물몇 살의 젊음 속에서 겪는 고통과 결핍,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미래를 생생하게 묘사해서 젊은 시절의 고통과 열정,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강렬한 생존 본능을 감각적으로 묘사해 깊은 공감을 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아무도 없어
마당은 바윗덩이 같은 그늘과
면도날 같은 햇볕의 소유
우린 들러리
영원히 신부가 되지 못하지
시제는 깨졌어
둥근 유리에 박힌 아카시아 가시 같은 실금도
새싹 같은 바늘도
결국 허깨비
시계 따윌 누가 봐?
무서운 건 죄
쥐는 안 망해
할미꽃 뿌리를 던진 항아리 속에서
흰 구더기들만 죽어
고요하게 풀을 기르지
복숭아꽃이 피면 뭐해?
비료 포대에 담긴 언 감자가
썩은내를 풍기는데
별들이 달보다 먼 곳에서 잉잉거리는데
대낮에도 귀신이 걸어다니는 이 집에서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가 울 때까지
찌르고 때려야지
멍이 드는 건 괜찮아
고름이 출렁이는 귓속에서
뻐꾸기 울음이 피는
느리고 평화로운 시간이 무서워
무슨 일이 일어나야 안심이 돼
「고요한 봄」
이 시는 불안과 고립, 그리고 무력감을 주제로 한 작품입니다.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무거우며 '현실'과 '비현실'이 섞인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시는
병든 달이 키워내는
캄캄한 그림자들
건드리기만 하면 눈동자에 감은 팽팽한 빛의 올이
튈 것 같은 새끼 고양이가
죽어가는 어미 뱃구레에 꼭 붙어 있다
신음을 통하지 못하는 썩은 목구멍
자주색 사자가 입을 벌리고 지키는 대문
저 안쪽에는
벽에 관절을 가는 미친 여자가 산다
얼마 전 문간방에는 죽은 지 열흘도 넘은 노인이
번쩍 눈을 뜨고 다시 살아나고 싶을 정도로
파리에 시달리고 있었다
은밀한 곳까지 파고드는 모기
너도 돌아버리고 싶겠지?
악취나는 하수구에 떨어져
거품을 껴안고 죽고 싶진 않겠지?
머릿속에 펼쳐진 수만 평 꽃밭이
눈앞에 올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말자
이 길 끝에는
불타버린 야산
나무와 벌레들의 무덤이 있다
사과만한 별들이 입을 쩍쩍 벌린다
검은 하늘에 이마를 박고 발버둥친다
「자정의 산책」
이 시는 강렬한 이미지와 어두운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고통, 죽음, 광기, 불안 등이 혼재된 어두운 내면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통해 삶의 고통과 절망을 그려냅니다. 또한,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무력감과 광기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나아가려는 모습을 담아낸 시 같았습니다.
김개미 시인의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이 시집 3부에서 나오는 소제목 '소리에도 베인다는 말'처럼 날카로운 언어들로 어두운 부분을 감각적으로 묘사해 주기 때문에 추천하는 시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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